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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해했니
“이해했니?”
“이해 가 되?”
“이제 알아들었어?”
성인이 어린이에게 어떤 것을 알려 준 다음에 가장 자주 말하는 문장들이다.
이런 질문은 그래도 귀여운 종류에 속한다.
모든 교수 방법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린이가 빨리, 쉽게,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연구한다.
시험이라는 것도 결국은 일정 기간 동안 배운 내용을
어린이가 얼마나 잘 이해해서 보존하고 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떤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것을 지성적인 활동으로 관철했다는 의미다.
발도르프 교육학적으로 보자면 ‘머리인간’이 활동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면 ‘머리’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해서 좋지 않은 시험결과를 받은 어린이에게는
‘똑똑치 못한’, ‘좀 모자란’, ‘학습부진’ 등등의 수식어를 수여하고, ‘5등급 정도의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은 게으르게 어깨 위에 앉아있는 머리만 지닌 괴물이 아니다.
느끼는 가슴과 활동하는 사지도 지니는 삼지적 존재다.
그리고 교육은,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라는 삼지적 성격을 골고루 발달시켜서
전인으로서 거친 삶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그러나 발도르프 교육을 기존의 교육에서 근본적으로 구분시키는 성격은
삼지적으로 인간을 교육해야 한다는 시각에 있지 않다.
인간의 삼지성이 골고루 발달 되어야 한다고 하면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머리를 좋게 하는 공부방법, 감성지수를 높이는 활동, 의지력을 강화하는 바깥놀이를
골고루 섞어서 교육에 적용해야 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주로 지성적인 활동을 하는 머리 인간을 깨우는 일이
어린이 발달의 일정시기까지 주로 의지활동과 감성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감성인간은 주로 꿈을 꾸고 있으며, 의지인간은 그저 잠자는 상태에 있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결코 어떤 것을 ‘이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꿈꾸는 감성인간은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예술활동으로,
잠자는 의지인간은 반복되는 리듬을 통해서 교육할 수 있을 뿐이며,
발도르프 교육방법론의 모든 것이 바로 이 원리에 근거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배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감성인간과 의지인간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머리인간을 깨운다는 것이
실로 ‘무면허 의사의 치료방법’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저 의미에 따라서 교육하지 않고, 의지에 의해서 잠자면서 체험되는 것에 따라서 교육을 하도록 인간의 삶이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즉 리듬적인 것, 박자, 선율, 색채의 조화, 반복, 아무 의미 없이 ‘스스로 활동하기’를 포착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아직 그 나이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반복하게 한다면, 그런 문장들을 순수하게 기억으로 각인하도록 한다면, 여러분이 의미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이의 이해에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의미는 나중에서야 비로소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의미를 ‘순결하지 않게 드러내어서’ 그저 이해시키려고 하는 교육으로는
머리인간만 교육할 수 있을 뿐, 결코 의지인간을 교육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린이가 지금은 아직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가르쳐서,
그것을 오랫동안 내면에 지니고 있다가 후일 교사가 그것을 다시금 반복해서 다루면
‘아하~ 그것이 바로 그것이었구나.’라는 느낌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런 식의 교육에서 한편으로는 어린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적으로 품고 지니는 동안 의지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번째 칠년 주기의 교육에서 너무나 중요한 ‘교사의 권위’가 역시 강화된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단어라서”라는 등의 생각을 가지고
교사가 무엇이든 간에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배움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고질적인 사고가 뼛속 깊이 들어 앉아 있다는 증거다.
어떤 일에 엄청나게 놀랄 경우에 우리는 결코 머리로만 놀라지는 않는다.
“간 떨어질 뻔 했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심장이 쿵쿵 뛴다.”
등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극단적인 상황을 인간은 항상 몸 전체로 받아들이고,
그런 것은 결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일에 해당하는 글씨 쓰기조차도
예술적 활동인 소묘에서 출발해야 하며,
가장 ‘골치’ 아픈 산수도 리듬활동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그렇다”라는 식의 개념정의를 통한 이해력 강화가 아니라,
그냥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니까’ 색이나 음, 시의 음조를 즐기면서 반복해서 따라하면서 배우고,
그런 우회로를 통해서 이해력과 사고력이 점차적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을
‘인간의 삶이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비단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바라보기’는 중요한 태도인 것 같다.
지나치게 이해력을 요구하는 교육의 결과로 인해서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항상 듣는 말이 ‘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해석해 달라는 것이다.
발도르프 교육학은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다.
‘들어서 아는 것’만 듣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차 안에서 계속해서 차를 밀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가슴으로 듣고 느끼면서 그 정서를 영혼에 녹아들게 한 다음에
점차적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차오르게 할 수 있는 참을성이 발도르프 교육학을 대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이다.
==발도르프 특수교육센터 카페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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